올해 여름, 저는 처음으로 해외 학회 구두 발표를 맡게 됐습니다. 대학원생 신분으로서는 제 연구를 국제 무대에서 검증받을 소중한 기회였지만, 한정된 연구비로 항공권과 숙박을 해결하려니 계산기 화면이 까맣게 느껴졌습니다. 학회 등록비만으로도 허덕이는 상황에서, 왕복 항공료를 정가 그대로 지불하면 생활비가 모조리 사라질 판이었거든요. 그렇게 맥이 빠진 밤, 항공권 가격 비교 포털의 배너 한 귀퉁이에 ‘왕복 49만 원 런던 직항, 오늘 단독 특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보통 프로모션 좌석이 일찍 소진된 뒤라면 150만 원은 각오해야 했기에, 화면을 누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링크를 통해 이동한 사이트는 ‘SkyTrail’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여행사였습니다. 디자인은 깔끔했고, “대형 항공사와 직접 계약한 전세 편”이라는 설명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마감 타이머가 20분 안쪽으로 줄어들었고, 화면 오른쪽 채팅창에는 “예약 완료”라는 알림이 쏟아졌습니다. 연구비 예산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저는 ‘지금 결제하지 않으면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익숙한 포털에서도 낯선 판매자
SkyTrail은 가격 비교 포털의 공식 제휴사 탭에 노출돼 있었습니다. 해당 포털은 ‘검증된 파트너’라는 배지를 달아 주곤 하는데, 이상하게도 SkyTrail 옆에는 회색 실루엣만 보였습니다. 클릭해 보니 “등록 검증 진행 중”이라는 짤막한 문구가 달려 있었지만, 언제부터 진행 중인지 날짜가 없었습니다.
리뷰를 확인하려 했으나, 방금 올라온 것 같은 평점 다섯 줄뿐이었습니다. “빠른 발권, 감사합니다” “문의 응대 친절해요” 같은 짧은 문장이 복사해 붙여 넣은 듯 반복됐고, 닉네임은 ‘sky001’, ‘sky002’처럼 규칙적으로 나열돼 있었습니다. 여기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제 발표 슬라이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압박감이 의심을 억눌렀습니다. 한국어 지원이 잘 안 되는 해외 항공사 사이트보다는 이곳이 훨씬 편해 보였으니까요.
완벽을 흉내 낸 전자항공권
결제 단계로 넘어가자 ‘무통장 입금 시 5% 추가 할인’이라는 배너가 눈에 띄었습니다. 할인 폭이 제법 커서 혹했습니다만, 카드 결제 모듈이 “시스템 점검 중”이라 회색으로 비활성화돼 있었습니다. 결제 금액이 46만 5천 원으로 더 내려가자, 손끝이 저절로 계좌번호 복사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수취인 명칭이 SKYTRAIL Co.가 아닌 개인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사업자 통장 아닌가요?”라고 문의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전세기 계약금이라 임시 전용 계좌를 사용한다”는 복잡한 설명이었습니다.
의아함을 떨치지 못한 채 ‘발권 전 미리보기’ 기능으로 내려받은 PDF 전자항공권을 열어 보았습니다. PNR 번호와 제 여권 영문명이 정확히 기입돼 있었고, 항공사마크도 제대로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권처’ 항목이 비어 있었습니다. 정식 시스템이 발급한 티켓이라면 반드시 GDS 코드가 적혀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항공사 공식 사이트에서 PNR을 조회해 봤지만,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만 나타났습니다.
먹튀위크의 스크린샷 한 장이 기적을
이쯤에서야 저는 한숨 돌리고 객관적인 근거를 찾기로 했습니다. 떠오른 곳은 사기 사례를 모으는 커뮤니티였습니다. 거기서 SkyTrail을 검색하자 놀랍게도 전세기 특가를 내세운 피해 제보가 같은 주에만 네 건 올라와 있었습니다. 특히 PDF 미리보기 형식이 동일했고, 결제 유도 문구도 “임시 전용 계좌”라는 설명까지 판박이었습니다. 더 결정적인 건, 피해자가 올린 가상계좌 끝 네 자리와 제가 방금 복사한 계좌가 일치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순간 몸이 얼어붙었지만, 동시에 계좌 송금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다행으로 느꼈습니다.
위기를 거울 삼아 세운 원칙
저는 즉시 가격 비교 포털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 SkyTrail의 의심 정황을 알렸고, 피해 사례 링크를 전달했습니다. 담당자는 “파트너사 검증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며 사과했고, 몇 시간 뒤 SkyTrail 페이지는 포털에서 삭제됐습니다. 저는 혹시 모를 개인정보 유출에 대비해 여권 사본과 연락처를 인적 사항 비공개 설정으로 전환했고, 향후 학회 지원비 결제는 학교 법인카드로만 진행하기로 내부 규정을 재확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는 항공권을 다시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조금 비싸더라도 항공사 공식 사이트에서 직구했고, 제 계좌에서는 추가 지출이 있었지만, 정신적 손해는 더 이상 커지지 않았습니다. 그 밤 이후 제게는 네 가지 수칙이 생겼습니다. 첫째, 시세보다 30% 이상 저렴하면 반드시 거래 이력을 찾아볼 것. 둘째, 결제 계좌가 법인 명의가 아니면 중단할 것. 셋째, PNR을 공식 사이트에서 먼저 조회해 볼 것. 넷째, 의심이 들면 먹튀위크 같은 커뮤니티에서 크로스체크해 볼 것.
이 일은 값싼 항공권보다 제 연구와 안전이 더 값지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습니다. 발표 슬라이드 수정보다 중요한 건, 현실 세계에서의 합리적 판단이라는 점을 몸소 배웠습니다. 오늘도 ‘특가’라는 단어가 눈에 띌 때마다 저는 한 번 더 호흡을 고릅니다. 안전한 여정이야말로 진짜 연구의 출발점이니까요.